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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탈출기

나는 가난하다

나는 가난하다


어릴때부터 가난했다.
부모님께서 사업의 핑계로 할머니댁에서 자랐다.
난 이상한 아이였나보다
학교를 들어간다고 집에 갔는데 가기싫다고 울고불고했다.
엄마의 허영심과 과시욕으로 사립초등학교에 다녔다. 그것도 중간에 난 그래서 초등학교 입학을 해본적이 없다.

난 그때 우리집이 부자인줄 알았다.
사립초등학교에 학교버스를 타고 학교를 다녔고 집은 공장이 있는 큰집이였다.
엄마의 부자놀이는 얼마가지 않았다.
시골로 이사를 가게되었고, 전학도 갔다.
얼마지나지 않아 집에 빨간딱지가 붙었고
한마디로 폭망했다
부모님 사업이 망했는데 나는 할머니집에 다시 가서 사는게 너무 좋았다.

지금도 그 어릴때 기억이 생생하다
추운 겨울날 시골길을 걷는데 너무 무서웠다.
너무너무 무서웠는데 할머니한테 간다는 이유로 무서움을 이겨내고 걸어서 갔다.
지금도 그 시골길은 무서운데 ㅎ
집에 들어서서 할머니 하고 불렀는데 너무 반갑게 내새끼 온다고 고생했다 하셨다.
지금처럼 전화도 없었고 내가 간다는 얘기도 없었는데 외출한 아이 맞이하듯이 맞아주셨다.

그날 부모님은 야반도주를 하셨을것이다.
철이없어 몰랐는데 고향동네인 부모님이 그러고 가셔서 할머니가 욕도 많이 먹고 돈도 갚으셨을텐데 내색한번 하지 않으셔서 잘 몰랐다. 동네 같이 살던 큰댁과 연이 끓어진건 우리 아빠의 사업탓이였다.

내가 나이가 들어서 생각해보니 할머니가 우리 때문에 너무도 많은 고생을 하셨다.
일가친척들로 이루어진 동네에서 평생을 사시면서 모진소리들이 많았을텐데 지금 생각해도 마음이 아픈데 어떻게 한번도 내색이 없으셨는지~~

동생이 7살 되던해에 할머니댁으로 오게 되었는데 동생은 엄마보고 싶다고 울었다. 난 할머니집에 왔는데 왜 우냐고 울지말라고 했다. 우는 동생이 너무 이상했으니 ~
나에네 부모님은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강하셨다.

동네에서 하나밖에 없는 구멍가게를 하시면서 우리자매를 키워 주셨다.
요즘 아이들은 학교가 무상교육이지만 학비면 책값이면 나이드신 할머니께서 혼자 감당하시기 힘드셨을텐데 그땐 왜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우리집은 자연스럽게 아끼게 되었다.
아니다 안쓸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래서 그게 나도 모르게 몸에 베인것지도 모르겠다.

첫직장을 다녀서 받은 월급은 32만원
할머니며 큰엄마. 큰아빠. 여동생, 사촌동생들 빨간내복을 샀다.
정말 라떼는 그랬다.
그때 17만원씩 3년을 넣으면 천만원이 되는 적금이 있었다. 지금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이자였지만 그적금을 할머니께 넣어달라고 매달 보내드렸는데 할머니께서는 차곡차고 적금을 들어주셨다.

만기가 되자 어디서 돈냄새를 맡았는지 아빠가 귀신같이 알고는 빌려달라고 하셨는데 그땐 몰랐다 그게 개미지옥인지
말이 빌리는거지 한번간 돈은 불랙홀이 되어 다시는 돌아오질 않았다.
그때 난  참 순진했다. 아니 바보였다.
그러길반복했고 나중에는 동생까지 동참했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돈으로 날 참 힘들게 했는데 그것때문에 나까지 힘들게 되었다.
내카드를 가지고 가서는 쓰고는 나 몰라라했고 아빠랑 동생은 서로 모르쇠로 말을 하지 않았고 , 동생은 푼돈으로 3달주다 끝
정말 말로만 듣던 카드대란을 나도 겪게 되었다. 난 쓰보지도 만져보지도 못한 돈인데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남편과 갚았다.